부러짐/ 서민서(20살)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우울하고, 슬펐던 시기에 대한 것이다. 남들에겐 사소할지도 모르는 이 경험은, 나의 취미 목록에서 한 줄을 완전히 삭제해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골절. 내가 가장 슬펐던 때는 다리가 부러졌을 때였다. 원체 슬픔을 크게 느끼지 않고 잘 울지도 않는 내가 매일 밤을 훌쩍이며 잤다. 부러진 뼈는 우울 그 자체였다.

발단은 중학교 때 있었던 체육대회였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매년 반 대항 체육대회를 열곤 했는데, 항상 그 열기가 뜨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지만, 수업 시간에 초콜릿 하나만 걸려있어도 기를 쓰고 발표를 하는 나이에 그런 체육대회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게다가 종목별로 1등반에게는 30만원이라는 상금이 걸려있으니 아이들이 목을 맬 만도했다. 남학생은 축구를 하고 여학생은 피구를 겨뤘는데, 피구대회에서의 기 싸움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브라질과 한국이 축구를 하는 것은 흥미진진하지 않다. 결과가 뻔할 뻔자니까. 축구는 이과반이 월등하게 잘해서 이미 내논 승부였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이 축구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자아이들의 피구가 그랬다. 각 반별로 실력도 비등비등할뿐더러, 반마다 정예 선수들이 확고했다. 그러니 수업이 끝난 후에 체육관 자리 쟁탈전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심지어 우리 반은 사비로 연습용 피구 공을 사오기까지 했다.

내가 속했던 3반과 바로 옆 반인 4반은 그중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우리 반 에이스들은 다음과 같다. 심심풀이로 시에서 여는 투포환 대회를 나갔다가 금상을 받아온 A, 몸집은 작지만 탱크나 불도저에 비유되곤 하던 B, 왼쪽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공을 던지는 등 예측불허로 공을 던져 천리안이라 불리던 C. 그리고 나는 그중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공을 피하는데 마지막까지 남아서 시간을 끄는 D’를 맡고 있었다. 옆 반의 화력도 쟁쟁했다. 체대 입시준비생 두 명, 어떻게 하는 건지 피구 공으로 야구마냥 커브볼을 구사하던 아이,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오듯 어디로 날아오는 공이든 척척 받아내던 아이. 양쪽 반 모두 실력도 실력이지만 한 성깔 하는 것도 비슷해서 교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뭇 날카로운 눈초리와 말들이 오가기도 했다. 체육 선생님이 아이들의 화합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마련했던 피구대회는 온갖 분란과 싸움의 장이 되었다.

아침조회 시간에 연습, 점심시간에도 연습, 학교 끝나고 학원가는 애들까지 붙잡아 연습에 연습. 초겨울 추위에 언 손을 녹이며 시작해도 피구 공을 넣을 때쯤에는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대진표는 또 왜 그렇게 짜였는지 예선전부터 4반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암암리에 예선이 결승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드디어 경기 당일, 5교시 체육수업에 두 반이 모였다. 긴장한 눈빛이 오가던 것도 잠시, 휘슬이 불자 고성이 오갔다. “공을 돌려!”, “피해!”, “너 선 넘었어!”, “죽여!” 경기 라인 밖으로는 각 반 남자애들이 빙 둘러싸 시끄럽게 응원을 했다. 불과 5분 남짓 사이에 상대편은 1, 우리 반애는 나와 영주라는 여자애만이 남았다. 나야 원래의 맡은 바 포지션(괴상한 비명의 날다람쥐)이지만, 영주는 보통이라면 초반에 공을 맞고 나가던 친구였다. 상대편 수비수들이 일사분란하게 공을 돌리며 나와 영주를 노렸다. 내 명치를 향해 공이 날아오고, 몸을 돌려 피하려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영주가 오른쪽 발을 밟고 있었다. 발은 붙잡혀 땅에 붙어있는데, 몸은 옆으로 넘어지니 뼈가 영 안 좋게 돼버렸다. 소란 가운데서 어떻게 들린지 모르겠지만, 심리적인건지 물리적인건지 모르겠지만, 꽤 또렷하게 우드득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한 책에서, 바나나 껍질을 까는 소리가 작은 동물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소리 같아서 바나나를 먹지 못하는 주인공이 있었다. 그땐 그 대목을 읽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내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어보니 정말 그랬다. 싱싱한 바나나 송이에서 바나나를 비틀어 꺾어서 뜯어내는 소리. 작고 나지막한 우드득이었다.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박은 건지 정신이 사납고 어지러웠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소리가 뿌예졌다. 와글와글와글. 왕왕왕. 몇 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몰려와 나를 둘러쌌다. 훅 끼쳐오는 열기와 땀 냄새. 경기시작 전 축구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둥그렇게 서서 파이팅을 다지는, 그 가운데에 놓인 듯한 난처함이었다.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지만 두려움이 컸다. 아이들의 몸뚱이가 내 다리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는데, 다들 하도 호들갑을 떨어서 나는 무슨 다리가 으스러진 줄 알았다. 각종 괜찮아?”들의 향연 속에서 들 것 좀 가져와!”라는 소리가 들렸다. , 나를 쪽팔림에 기절하도록 할 셈이군. 눈물범벅으로 바닥에 누워 뻐르적거리는 사람이 괜찮아! 나 혼자 일어날게!”를 외치니 아무도 믿어줄리 없었다. 결국 보건실에서 들 것이 왔고 친구들이 날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때 옆 반 남자애 한 명이 내 다리를 쓱 보면서 한마디 했다. “뭐야. 피도 안 나네그 비웃음 덕분에, 나는 혼자 걸을 힘이 생겼다. 간신히 일어나 다리를 내려다보니, 그 애 말대로 딱히 다쳐보이지도 않았다. 다리는 뻔뻔스럽게도 ? ?”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는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럽게도, 콩콩콩 뛰어가기 시작했다. 절뚝절뚝. 콩콩. 다시 절뚝. 발목에 이쑤시개가 박힌 것 같았지만 그 아픔조차 수치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엄살이 심했나. 이 엄살은 병원에 가서도 계속됐다. 급한 대로 작은 동네 정형외과에 들어갔는데 의사는 인대가 놀란 것 같다고 말했다. 깁스를 하러 간호사를 따라들어 갔는데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으로 돌아갈 때마다 악 소리가 났다. “어휴~엄살이 심하네! 이렇게 풀어줘야 빨리 나아!”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내가 다쳐서 나간 뒤에 다른 친구가 대타로 들어가 경기를 계속했는데, 시간 초과로 우리 반이 승리했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피구고 뭐고 다리가 너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나는 반에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부상 투혼!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은 옆 반 아이들의 욕이었다. 내가 시간을 끌어서 부당하게 경기를 끝냈다는 것이었다.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오갔고, 안 그래도 깁스를 하고 절룩거리는 것이 민망했던 나는 상처 입은 달팽이처럼 껍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뛰어다니고 매점을 숨 쉬듯 오가던 나는 앉은뱅이가 되어 의자에 앉아 살기 시작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이까짓 인대 늘어난 것, 며칠만 참으면 된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다리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붓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하고 발 딛을 때마다 찌르는 통증도 여전했다. 결국 더 큰 병원을 찾았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의사가 말했다. “이거 깁스 집에서 했어요? 왜 거꾸로 해놨어?” 깁스를 풀고 엑스레이를 찍자 결과는 골절, 전치 6주였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하고 싶다. 가람마을에 있는 연세사랑의원은 가지 말기를. 연세라는 이름 아래에 사랑을 가득 담아 부러진 뼈를 조물딱 거려 주는 간호사와 돌팔이 의사가 있으니.

그 이후는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삶의 낙이었던 체육 시간은 지루한 명상 시간이 되었고, 쉬는 시간은 수면 시간이 되었다. . . 잠의 연속.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며 잠만 늘었다. 내가 만약 앉아서 도란도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으면 그렇게까지 우울해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점심시간에 캐치볼을 하고, 쉬는 시간에 탁구를 치고, 주말이면 동네방네를 싸돌아다니던 인간이었다.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프라페를 원샷 때리고 밖으로 나가는 인간. 이런 단순무식한 놈은 살면서 어디 가서 미움을 받아볼 일도 거의 없다. 맨날 뛰어 놀기만 하니 뒷얘기가 나올 자리도 없고 욕할 먹을 짓도 할 새가 없지. 그런 사람이 기동력을 잃고 처음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니 몸과 마음이 힘들 수밖에. 부러짐은 수치이고, 감옥이고, 표적이었다. 결국은 급식실도 가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친구들이 깁스한 게 뭐가 부끄럽냐며 끌고 나가려 부단히 애를 썼지만, 나중엔 매점에서 빵을 사다주었다. 빳빳하게 알이 서있던 다리는 날이 갈수록 근육이 녹아서 얇아지고 말랑말랑해졌다. 까무잡잡하던 얼굴은 허여멀겋고 칙칙해졌다.

끝없는 우울 속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눈치였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14명인데 피구 인원은 11명이네?’, ‘축구 인원은 11명인데 나머지 남자애 두 명은 뭘 하지?’ 둔하기 짝이 없지만 처음으로 이런 의문을 가진 것이다. 내가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체육을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니, 그동안 비협조적인 인간, 귀차니즘 덩어리, 뒷방 노인네라고 여기던 아이들이 이해가 됐다. 체육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체육이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런 애들도 있지만), 못해서 싫은 것이다. 스탠드에 앉아 멍하니 지켜보거나 운동장을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은 그 후에도, 고등학교에 와서도 매년 있었다. 체육시간은 폭력이 다분하다. 그리고 세상엔 이렇게 내가 눈치 채지 못한 폭력이 다분하겠지. 나같이 둔한 놈은 어디 한군데 부러지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주제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보면 드라마에서 못된 갑부가 나와서 넌 니 주제파악이나 해라고 쏘아 붙이곤 한다. 생각해보면 이게 현자의 말씀이시다. 내 발을 즈려밟아 준 영주. 난 영주가 영주가 내 발을 밟았다는 내 발을 밟은걸 알면 미안해 할까봐, 죄책감을 가질까봐,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리가 다 나은 후에, 어쩌다 영주랑 피구대회 이야기를 다시 할 기회가 생겼었다. 그런데 그 애가 아무렇지 않게,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아 맞아. 그때 너 발 내가 밟은거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걸 알았냐며 물었다. 아주 쿨하게도 자기가 밟았는데 어떻게 모르겠냐는 말이 이어졌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나 혼자 유난을 떨고, 혼자 성자인척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생각해보면 애들끼리 놀다가 좀 다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나야 내가 사는 세계가 우주의 중심이고, 나의 아픔이 최고의 비극이지만, 사실은 멀리서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이다. 다리가 부러진 아픔은 엄살이 아니었지만, 그 아픔을 대하는 태도는 엄살덩어리였던 것 같다.

어찌되었건 골절은 나를 많이도 바꿔놓았다. 깁스를 풀고 나서도 녹아내린 다리 근육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운동장 열 바퀴를 가뿐히 돌던 것은 옛말이 되었고, 두 바퀴만 뛰어도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덕분에 매일 동국대를 기어오르며 고통 받고 있다. 집순이가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주말에 침대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취미 목록에서 체육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탁구나 당구 같이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되는 것만 가끔 하는 편이다. 그래도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 거기에 의의를 두려한다. 그래도 다신 어디 부러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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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 서민서 (18)






채 여물기도 전

녹빛 아기손바닥들은

숙명적으로 안다


제 몸이 가장 아름다운

붉음이 될 때

땅으로 땅으로

추락하여

짓밟히리라는 것을


세계는

그예 박수를 치고

그들은 그렇게

환호 속에 죽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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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갯짓/ 서민서(18)

 

 

 

흔들림을 보노라


흔들림을 보노라


모과나무도


제비꽃도


햇살도


흔들리며 내리노라


그림자도 흔들리노라


마당 앞 전봇대도


남몰래 작게 흔들리노라


빙빙 도는 저 나비


날갯짓에


온 세상이 흔들리노라


창가에 선 나도


흔들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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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 서민서(17)

 

 

 

네온싸인 속으로

아무리 달려도

없어,

굴뚝이 없어

 

루돌프

아이들은 왜 변할까

나이를 먹으면

우린 뻥이래

 

루돌프

눈이 오는게 싫대

차가 막히고

옷이 젖어서

 

사랑해 루돌프

하지만 우린 잊혀졌어

순수한 사람은

등쳐 먹는 세상이야

 

네온싸인 속으로

아무리 달려도

없어,

갈 곳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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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 서민서(17)

 

 

 

 

너를 들쳐 업고, 나는

산을 오르리

 

내 귀에 악을 쓰고

목을 조르는 너를 업고, 나는

산을 오르리

 

산 중턱에 다다르니

너는 제풀에 지쳐 잠들었다

 

그런 너를 업고, 나는

넘어지며 깨지며

산을 오르리

 

손톱 밑엔 흙이 끼고

두 무릎은 까져 피를 흘리며

정상에 다다랐을 때

목이 터져라 내지른 비명

 

그 순간

너는

메아리

메아리

메아리가 되어 사라졌다

 

 

 

 

 

민서가 이 시로 산림문화공모전에서 장려상을 탔다.

하교길 차 안에서 5분만에 써내려간 시..

대견스러워 온통 자랑하고픈 맘..

아이는 시큰둥해하며 흥분해 있는 엄마를 어이없어한다.

니두 엄마 되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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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寒시 / 서민서(16)

 

 



비는 오는데
잠은 안온다
홀로 방안에 갇혀 있노라면
시계초침이 멈추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또 다시
구석으로 구석으로 기어들어간다
내가 있던 자리엔
오만가지 생각들이
판을 치고 널뛰고 있다
파닥파닥거리는 생각들
마치 내 심장처럼
살아 있다
숨을 쉰다
아직은 나 또한.
그들은 웅크리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차가운 숨결을 내뱉고
나는 얼어붙는다
나는 숨을 멈추고
동이 틀 때가 되서야
비로소 내쉰다
새벽 寒시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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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용법 / 서민서(17)

 

 

 

나를 사랑하는 이 있거든

남몰래

내 방 창문 앞

목단을 심어주오

봄 밤

침대에 뉘면

개구리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그 향기 맡게

그게 바로 나를 살리는

길이나니

 

나를 싫어하는 이 있거든

조용히

내 방 창틀에

죽은 새 놓아 두오

가을 밤

침대에 뉘면

귀뚜라미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그 향기 맡게

그게 바로 나를 죽이는

길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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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 / 서민서(17)

 

 

 

조동이가 짧아

밥먹기를 멀리하는

나는

상머리에 앉으면서부터

밥그릇이 반절 넘게 차있으면

밥 많다 덜어내라 한다

 

후덥지근 눅눅한 이불을

발로 뻥뻥 까재끼고 일어난

그날 아침엔

왠일인지

밥이 적었다

입안 그득 물고 있던

군소리를

꿀떡 삼키고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데

머잖아 드러나는

다 뭉개진

밥알,

꼭꼭 눌러 담아

형체도 없이 떡이 된

밥알,

아, 밥알갱이

 

나는 암말도 못하고

엄마가 밀어준 가지나물만

우적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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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전화 / 서민서(17)

 

 

 

그 가지런한 목소리 앞에서

나는

가장 단호하고

가장 무례하고

가장 냉정하고

가장 예의없이

수화기가 부서져라

호두 껍질 깨듯

딱! 소리가 경쾌하게

약간의 즐거움마저 느끼며

안녕하냐고 채 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는다.

 

그런데

오늘은,

시계소리 유난히 큰

오늘은,

까마귀 한 마리

전기줄에 혼자 앉아 있는

오늘은,

어쩐지 그 목소리가

서럽게 들려서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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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많은 날/ 서민서(16살)

 

 

 

 

 

비가 내린다. 학교는 너무 좁다. 누구도 화살처럼 쏟아지는 비를 보고 밖으로 나가려하지 않았다. 학교 안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넘쳐난다.

내 몸은 대인기피증에 적합하게 만들어져 있다. 작은 키에 뼈 밖에 안 남아 비쩍 마른 팔다리. 작고 조심스러운 행동들. 이것들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고 타인과 살이 스칠 확률을 최대한 줄여주는 요소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 덩치 좋은 몸에 큰 목소리, 과장된 몸짓들. 그들 모두가 나처럼 행동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내 주위로 가로세로 1m 이내로 가까이 오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그들은 내 공간을 수시로 침범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흠칫 놀라며 한동안 바들바들 떨어야 했다. 어딜 가나 사람이 바글거릴 것을 알기에 쉬는 시간에도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 했으나 내 바로 앞 책상에 모여 떠들고 있는 여자애들은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다. 숨이 막힌다.

낄낄낄

높고 날카로운, 그래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들. 그들은 수업이 끝나자 빠른 속도로 뭉쳐져서 소곤거리고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환호성을 지르다 미친 듯이 웃어재꼈다.

급기야 한명이 웃다가 쓰러져 내 발치에 엎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새된 목소리를 내질렀다. 신음과 비명의 중간쯤 되는 소리였다. 그러자 그들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이 일제히 바닷물에서 건져 올린 조개들 마냥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내장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나는 그 시선들을 피해 떨리는 두 다리를 움직여 교실 문 쪽으로 비칠비칠 걸어갔다. 두 귀에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낡아서 뻑뻑한 교실 문을 힘겹게 열자 나는 얼어붙고 말았다.

복도는 더 이상 내가 다닐 수 없는 곳이 되어있었다. 섞이고 섞여 누구의 것인지 알 길이 없는 수많은 목소리들. 훅 끼쳐오는 뜨겁고 축축한 공기. 뭔지 모를 찝찝한 냄새. 넘실거리는 살덩어리들. 숨을 쉬면 코와 입으로 피가 줄줄 흐를 것만 같다. 차라리 불구덩이를 지나가는 것이 더 쉬워보였다. 다시 교실로 돌아가지도 복도로 나가지도 못 한 채 문턱에 서서 5분쯤 서있었을까.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아 살았구나. 수군대던 여자애들은 각자 자기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도 천천히 눈치를 보며 내 자리에 가 앉았다.

아직 3교시 밖에 안됐는데 벌써 온몸의 힘이 다 빠져 나갔다. 수업이 시작하고 나는 바짝 긴장하고 있던 것이 풀어지면서 스르르 잠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놀이공원에 있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곳에.

그런데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옆에 보이는 회전목마로 다가갔다. 내가 느릿느릿 말에 올라타자 덜컹 하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빙빙 돌고 있는데 옆의 백마가 다가와서 말했다.

너는 사내자식이 뭐 이리 겁이 많냐?”

나는 아무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또한 왜 그런지 궁금하다. 나는 왜 사람을 무서워하는가.

나 자신도 사람인데. 백마는 멍하니 말없는 내 모습을 비웃고는 나를 지나쳐 앞으로 갔다.

이번에는 호박 마차가 옆으로 다가왔다. 마차 안에는 신데렐라에 나오는 요정 할머니가 있었다. 오동통한 손에 요술 지팡이가 꼭 쥐어져있었다. 할머니가 말했다.

뭐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글쎄, 뭐 때문일까? 내가 알기론 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랬는데.

태어날 때부터 뇌에 작은 기형이 있었나?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그녀가 마신 담배연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기억은 못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학대받아왔나?

그건 아닐 거다. 부모님은 지극히 정상이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가본 기억이 없으니까.

내 기억의 시작부터 나는 언제나 사람을 무서워해왔다.

나를 원망해야 하는 건가 신을 원망해야 하는 건가.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요정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한심한 놈

그러더니 지팡이를 높게 들더니 그대로 내 정수리를 내려쳤다. 그리고 나는 둔탁한 고통과 함께 꿈에서 깼다.

 

현실에서는 선생님이 두꺼운 출석부를 들고 내 앞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출석부로 나를 내려친 것 같다. 애들 창피주기로 유명한 사회 선생님이었다.

감히 내 수업에서 잠을 자? 노래 한 곡 부르면 깨겠구나. 이리 나와라!”

선생님은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하더니 내 가는 팔을 억세게 붙잡고 교탁 옆으로 끌고 나갔다.

64개의 눈들이 나를 향해 있다. 나는 파랗게 질려서 중풍환자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안 부르고 뭐하나. 진도 나가야 되니 어서 부르고 들어가라. 얘들아 박수 좀 쳐라!”

64개의 손들이 천둥같이 맞부딪혔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숨이 가빠왔다.

그리고 멍한 뇌와 달리 두 다리가 본능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니 내 다리는 무슨 힘이 난건지 재빠르게 교실 문으로 뛰어갔고 두 손은 기다렸다는 듯이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나는 텅 빈 복도를 내달았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서 망설임 없이 교문을 뛰쳐나갔다. 비가 내 두 뺨을 아프게 두들겼지만 나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른 채 계속 달렸다.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달려 나갔다. 처음으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이런 거리를 움츠리지 않고 지나쳤다. 정신을 차려 보니 육교 위였다. 발밑으로 차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지나가는 차들이 와이퍼를 흔들며 나에게 최면을 거는 것 같다.

뛰어내려. 뛰어내리라고. 이 작은 지구에는 6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고. 니가 그걸 견딜 수 있겠어? 뛰어내려.’

차들의 말이 맞다. 난 그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뛰어내릴까? 아니, 그럴 용기도 없다. 내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몰려와 내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뛰어내리는 대신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질렀다기보다는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본 것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 나는 왜 이 모양 인거야.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내 목소리는 빗속을 뚫고 어딘가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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