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짐/ 서민서(20살)
이 이야기는 내가 가장 우울하고, 슬펐던 시기에 대한 것이다. 남들에겐 사소할지도 모르는 이 경험은, 나의 취미 목록에서 한 줄을 완전히 삭제해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골절. 내가 가장 슬펐던 때는 다리가 부러졌을 때였다. 원체 슬픔을 크게 느끼지 않고 잘 울지도 않는 내가 매일 밤을 훌쩍이며 잤다. 부러진 뼈는 우울 그 자체였다.
발단은 중학교 때 있었던 체육대회였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매년 반 대항 체육대회를 열곤 했는데, 항상 그 열기가 뜨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지만, 수업 시간에 초콜릿 하나만 걸려있어도 기를 쓰고 발표를 하는 나이에 그런 체육대회는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게다가 종목별로 1등반에게는 30만원이라는 상금이 걸려있으니 아이들이 목을 맬 만도했다. 남학생은 축구를 하고 여학생은 피구를 겨뤘는데, 피구대회에서의 기 싸움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브라질과 한국이 축구를 하는 것은 흥미진진하지 않다. 결과가 뻔할 뻔자니까. 축구는 이과반이 월등하게 잘해서 이미 내논 승부였다. 그러나 일본과 한국이 축구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여자아이들의 피구가 그랬다. 각 반별로 실력도 비등비등할뿐더러, 반마다 정예 선수들이 확고했다. 그러니 수업이 끝난 후에 체육관 자리 쟁탈전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심지어 우리 반은 사비로 연습용 피구 공을 사오기까지 했다.
내가 속했던 3반과 바로 옆 반인 4반은 그중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혔다. 우리 반 에이스들은 다음과 같다. 심심풀이로 시에서 여는 투포환 대회를 나갔다가 금상을 받아온 A, 몸집은 작지만 탱크나 불도저에 비유되곤 하던 B, 왼쪽을 보면서 오른쪽으로 공을 던지는 등 예측불허로 공을 던져 천리안이라 불리던 C. 그리고 나는 그중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공을 피하는데 마지막까지 남아서 시간을 끄는 D’를 맡고 있었다. 옆 반의 화력도 쟁쟁했다. 체대 입시준비생 두 명, 어떻게 하는 건지 피구 공으로 야구마냥 커브볼을 구사하던 아이,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오듯 어디로 날아오는 공이든 척척 받아내던 아이. 양쪽 반 모두 실력도 실력이지만 한 성깔 하는 것도 비슷해서 교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뭇 날카로운 눈초리와 말들이 오가기도 했다. 체육 선생님이 아이들의 화합과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마련했던 피구대회는 온갖 분란과 싸움의 장이 되었다.
아침조회 시간에 연습, 점심시간에도 연습, 학교 끝나고 학원가는 애들까지 붙잡아 연습에 연습. 초겨울 추위에 언 손을 녹이며 시작해도 피구 공을 넣을 때쯤에는 등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대진표는 또 왜 그렇게 짜였는지 예선전부터 4반과 경기를 하게 되었다. 암암리에 예선이 결승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드디어 경기 당일, 5교시 체육수업에 두 반이 모였다. 긴장한 눈빛이 오가던 것도 잠시, 휘슬이 불자 고성이 오갔다. “공을 돌려!”, “피해!”, “너 선 넘었어!”, “죽여!” 경기 라인 밖으로는 각 반 남자애들이 빙 둘러싸 시끄럽게 응원을 했다. 불과 5분 남짓 사이에 상대편은 1명, 우리 반애는 나와 영주라는 여자애만이 남았다. 나야 원래의 맡은 바 포지션(괴상한 비명의 날다람쥐)이지만, 영주는 보통이라면 초반에 공을 맞고 나가던 친구였다. 상대편 수비수들이 일사분란하게 공을 돌리며 나와 영주를 노렸다. 내 명치를 향해 공이 날아오고, 몸을 돌려 피하려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영주가 오른쪽 발을 밟고 있었다. 발은 붙잡혀 땅에 붙어있는데, 몸은 옆으로 넘어지니 뼈가 영 안 좋게 돼버렸다. 소란 가운데서 어떻게 들린지 모르겠지만, 심리적인건지 물리적인건지 모르겠지만, 꽤 또렷하게 ‘우드득’ 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한 책에서, 바나나 껍질을 까는 소리가 작은 동물의 목뼈를 부러뜨리는 소리 같아서 바나나를 먹지 못하는 주인공이 있었다. 그땐 그 대목을 읽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내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어보니 정말 그랬다. 싱싱한 바나나 송이에서 바나나를 비틀어 꺾어서 뜯어내는 소리. 작고 나지막한 우드득이었다.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박은 건지 정신이 사납고 어지러웠다. 귀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소리가 뿌예졌다. 와글와글와글…. 왕왕왕…. 몇 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몰려와 나를 둘러쌌다. 훅 끼쳐오는 열기와 땀 냄새. 경기시작 전 축구선수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둥그렇게 서서 파이팅을 다지는, 그 가운데에 놓인 듯한 난처함이었다.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지만 두려움이 컸다. 아이들의 몸뚱이가 내 다리를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볼 수 없었는데, 다들 하도 호들갑을 떨어서 나는 무슨 다리가 으스러진 줄 알았다. 각종 “괜찮아?”들의 향연 속에서 “들 것 좀 가져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 나를 쪽팔림에 기절하도록 할 셈이군. 눈물범벅으로 바닥에 누워 뻐르적거리는 사람이 “괜찮아! 나 혼자 일어날게!”를 외치니 아무도 믿어줄리 없었다. 결국 보건실에서 들 것이 왔고 친구들이 날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 때 옆 반 남자애 한 명이 내 다리를 쓱 보면서 한마디 했다. “뭐야. 피도 안 나네” 그 비웃음 덕분에, 나는 혼자 걸을 힘이 생겼다. 간신히 일어나 다리를 내려다보니, 그 애 말대로 딱히 다쳐보이지도 않았다. 다리는 뻔뻔스럽게도 “잉? 왜?”라고 말하는 듯 했다. 나는 우스꽝스럽고 수치스럽게도, 콩콩콩 뛰어가기 시작했다. 절뚝절뚝…. 콩콩. 다시 절뚝. 발목에 이쑤시개가 박힌 것 같았지만 그 아픔조차 수치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엄살이 심했나. 이 엄살은 병원에 가서도 계속됐다. 급한 대로 작은 동네 정형외과에 들어갔는데 의사는 인대가 놀란 것 같다고 말했다. 깁스를 하러 간호사를 따라들어 갔는데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왼쪽 오른쪽으로 돌아갈 때마다 악 소리가 났다. “어휴~엄살이 심하네! 이렇게 풀어줘야 빨리 나아!” 병원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내가 다쳐서 나간 뒤에 다른 친구가 대타로 들어가 경기를 계속했는데, 시간 초과로 우리 반이 승리했다는 말이었다. 그때는 피구고 뭐고 다리가 너무 아파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니 나는 반에서 영웅이 되어 있었다. 부상 투혼!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들리는 것은 옆 반 아이들의 욕이었다. 내가 시간을 끌어서 부당하게 경기를 끝냈다는 것이었다. 복도를 지나다닐 때마다 날카로운 눈초리가 오갔고, 안 그래도 깁스를 하고 절룩거리는 것이 민망했던 나는 상처 입은 달팽이처럼 껍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뛰어다니고 매점을 숨 쉬듯 오가던 나는 앉은뱅이가 되어 의자에 앉아 살기 시작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이까짓 인대 늘어난 것, 며칠만 참으면 된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다리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붓기는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하고 발 딛을 때마다 찌르는 통증도 여전했다. 결국 더 큰 병원을 찾았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의사가 말했다. “이거 깁스 집에서 했어요? 왜 거꾸로 해놨어?” 깁스를 풀고 엑스레이를 찍자 결과는 골절, 전치 6주였다.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하고 싶다. 가람마을에 있는 연세사랑의원은 가지 말기를. 연세라는 이름 아래에 사랑을 가득 담아 부러진 뼈를 조물딱 거려 주는 간호사와 돌팔이 의사가 있으니.
그 이후는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삶의 낙이었던 체육 시간은 지루한 명상 시간이 되었고, 쉬는 시간은 수면 시간이 되었다. 잠. 잠. 잠의 연속.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며 잠만 늘었다. 내가 만약 앉아서 도란도란 수다 떠는 것을 좋아했으면 그렇게까지 우울해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점심시간에 캐치볼을 하고, 쉬는 시간에 탁구를 치고, 주말이면 동네방네를 싸돌아다니던 인간이었다.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프라페를 원샷 때리고 밖으로 나가는 인간. 이런 단순무식한 놈은 살면서 어디 가서 미움을 받아볼 일도 거의 없다. 맨날 뛰어 놀기만 하니 뒷얘기가 나올 자리도 없고 욕할 먹을 짓도 할 새가 없지. 그런 사람이 기동력을 잃고 처음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니 몸과 마음이 힘들 수밖에. 부러짐은 수치이고, 감옥이고, 표적이었다. 결국은 급식실도 가지 않게 되었다. 처음엔 친구들이 깁스한 게 뭐가 부끄럽냐며 끌고 나가려 부단히 애를 썼지만, 나중엔 매점에서 빵을 사다주었다. 빳빳하게 알이 서있던 다리는 날이 갈수록 근육이 녹아서 얇아지고 말랑말랑해졌다. 까무잡잡하던 얼굴은 허여멀겋고 칙칙해졌다.
끝없는 우울 속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눈치였다. ‘우리 반 여자애들은 14명인데 피구 인원은 11명이네?’, ‘축구 인원은 11명인데 나머지 남자애 두 명은 뭘 하지?’ 둔하기 짝이 없지만 처음으로 이런 의문을 가진 것이다. 내가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체육을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이 되니, 그동안 비협조적인 인간, 귀차니즘 덩어리, 뒷방 노인네라고 여기던 아이들이 이해가 됐다. 체육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체육이 싫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물론 그런 애들도 있지만), 못해서 싫은 것이다. 스탠드에 앉아 멍하니 지켜보거나 운동장을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는 아이들은 그 후에도, 고등학교에 와서도 매년 있었다. 체육시간은 폭력이 다분하다. 그리고 세상엔 이렇게 내가 눈치 채지 못한 폭력이 다분하겠지. 나같이 둔한 놈은 어디 한군데 부러지고 나서야 깨달은 것이다.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주제파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끔 보면 드라마에서 못된 갑부가 나와서 “넌 니 주제파악이나 해”라고 쏘아 붙이곤 한다. 생각해보면 이게 현자의 말씀이시다. 내 발을 즈려밟아 준 영주. 난 영주가 영주가 내 발을 밟았다는 내 발을 밟은걸 알면 미안해 할까봐, 죄책감을 가질까봐,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나중에 다리가 다 나은 후에, 어쩌다 영주랑 피구대회 이야기를 다시 할 기회가 생겼었다. 그런데 그 애가 아무렇지 않게, 뭐가 대수냐는 식으로, “아 맞아. 그때 너 발 내가 밟은거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걸 알았냐며 물었다. 아주 쿨하게도 자기가 밟았는데 어떻게 모르겠냐는 말이 이어졌다. 집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나 혼자 유난을 떨고, 혼자 성자인척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생각해보면 애들끼리 놀다가 좀 다칠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대수라고. 나야 내가 사는 세계가 우주의 중심이고, 나의 아픔이 최고의 비극이지만, 사실은 멀리서 보면 별것도 아닌 것이다. 다리가 부러진 아픔은 엄살이 아니었지만, 그 아픔을 대하는 태도는 엄살덩어리였던 것 같다.
어찌되었건 골절은 나를 많이도 바꿔놓았다. 깁스를 풀고 나서도 녹아내린 다리 근육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운동장 열 바퀴를 가뿐히 돌던 것은 옛말이 되었고, 두 바퀴만 뛰어도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덕분에 매일 동국대를 기어오르며 고통 받고 있다. 집순이가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주말에 침대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기쁨을 알게 된 것이다. 취미 목록에서 ‘체육’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탁구나 당구 같이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되는 것만 가끔 하는 편이다. 그래도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으니, 거기에 의의를 두려한다. 그래도 다신 어디 부러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