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꺼내 보고픈 글과 시

있는 그대로 - 침묵의 큰 스승, 마하리쉬의 가르침

t시월나비 2011. 3. 8. 17:00

 

 

 

 

 

 

 

 

 

 

무크티(해탈, 자유)와 깨달음은 같은 것입니까?

 

무크티는 우리의 본성이며, 우리의 다른 이름이다.그러므로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매우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시원한 그늘에 앉아 있던 사람이 제 발로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양지로 걸어나가 더워서 못 살겠다고 투덜거린다.

그는 그늘을 찾아 여기저기 헤매다가, 적당한 그늘을 만나면 '아 정말 시원하구나. 이렇게 시원한 그늘이 있었는데

왜 진작 몰랐던가!' 하며 즐거워한다. 원래 그늘 밑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자유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그대들의 모습이 꼭 이와 같다.

 

 

 

 

 

 

 

 

 

 

우리는 실재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되어 있다고 상상함으로써, 분리를 극복하고 실재와 하나 되기 위해 맹렬한 영적인 수행을 한다.

있지도 않는 분리감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선생님은 존재를 말씀하십니다만, 존재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대의 의무는 이것이 되거나 저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나(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라는 말은 모든 진리의 요약이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은 '고요하라' 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고요하라' 는 말은 그대가 생각하는 그대 자신을 소멸시키라는 뜻이다.

그대가 '나' 라고 생각하는 모든 형상과 모양은 혼란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저런 사람' 이라는 관념을 포기하라.고요해지기만 하면 참자아를 깨닫는다.

이보다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참자아에 대한 앎은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아는 것이 유일하게 추구할 가치가 있는 앎이다.

이것을 표적으로 삼아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여, 가슴으로 예리하게 깨닫도록 하라.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 이 앎은, 흥분과 고통으로 뒤얽힌 마음의 활동이 멎고 투명해질 때 그 순수한 의식에 비친다.

이 순수한 의식은 형태가 없는 참자아인 가슴 속에서 항상 빛나고 있음을 알도록 하라.

이 앎은 자신을 형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관념으로 존재하는 그 어느 것과도 연관시키지 않고,

자신을 완전한 실재로 보는 사람에게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