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신촌 기차역 근처에
무진기행이라는 집이 있었지요.
지금은 거대한 메가박스와 밀리오레에 떠밀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여기쯤일까 싶게 휑하지만요.
얼마전까지는 정 붙일 곳 없는
옷가게와 모텔들이 즐비한 신촌 이대거리에
눈여겨 찾아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십상인,있는듯 없는듯..
그러나 조용히 언제나처럼 빛나고 있던 그 집,무진기행
쇼윈도우라고도 할 것도 없는 그 부분엔 동그란 마차바퀴살이 놓여있고
그 중앙엔 하얀 양초가
항상 촛농을 흘려 보내며 노란 불빛을 다소곳이 피우고 있었지요.
건너편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그 양초에 불이 켜져 있으면 절로 맘이 훈훈해지는 그런...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치 그 집이 눈에 안보이기라도 하듯이 그 곳엘 가자 하면 그런 곳이 있냐며
깜짝 놀라는 것이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거리는 젊음이 형형색색의 빛깔로 넘쳐나며
자유와 방종의 모호한 경계선을 잘도 넘나드는 곳
그런 칙칙한 곳이 눈에 뜨일리 만무겠지요.
그 안엘 들어서면 화장기없고 퍼머기없는 머리 희끗한 말간 얼굴의 주인장이
박완서같은 웃음으로 맞아주었지요.
그녀 곁엔 그 연배의 비슷한 남자들이 두엇 담배를 피우며 맥주병을 기울이고 있고
한쪽 벽면엔 그녀가 젊었을 때부터 모아옴직한 한 장 한 장 추억이 담겨 있을 듯한
오래된 레코드 판들이 낡게 쌓여 있었지요.
어느날쯤은 혼자서도 불쑥 들어가 맥주 한 잔 마시며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기차 시간 맞춰 부리나케 뛰어 나오던 곳..
지금은
신호를 기다리며 어디에 눈을 맞춰야 할지..
그 하얀 양초가 그립습니다.
무 진 기 행
김승옥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있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