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아무 생각없이 스쳐 지나갔던 일상이나 사물들이
한 해 두 해 나이 들어가며 다시 새롭고 더없이 소중해지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이 메주다.
메주가 탄생시키는 된장과 간장..
몇해 전부터 엄마가 콩을 심으며 가꾸시는걸 보며 올핸 꼭 같이 해보리라 마음 다지면서도
구경도 못해보던..
이번엔 휴가를 내서라도..하며 맘 먹었는데 여시 올해도 약간의 사고로 고만 놓치고 말았다.
너무 아쉬워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다.
지난해 4월쯤이었나?
한약찌꺼기로 살을 찌워 낸 땅에 콩알갱이들을 몇알씩 쭉 심었다.
일일이 물을 부어 주느라 허리를 두들겼던 기억이..
그러더니 어느새 가을 오고 콩줄기가 마치 시들어가는 것처럼 누렇게 변해갔다.
설익은 콩줄기를 잘못 뽑았다가 엄마한테 한소리도 들었었지.
어느 일요일 네식구가 밭둑에 앉아 그 콩깍지 따내느라 어찌나 힘들었던지..
민서는 새참내느라 분주했다.
그날 나는 가을 햇살에 얼굴이 벌겋게 익어 오래도록 애먹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콩과 씨름을 했다.
콩깍지들을 볕에 말린 후 덜 터져나온 콩들을 일일이 까내느라..
지금도 가을햇살에 툭툭 터져나오던 콩들의 소리가 선하다.
주무시라고 인사드리러 가면 엄마는 의례히 콩을 만지고 계셨다.
콩이 자식 같다고..
보기만 해도 대견하다고..
그 콩을 삶아 찧어 만든 것이 저 메주인 것이다.
모양새도 올망올망 자그맣게 어찌나 예쁘던지..
방바닥에서 띄울땐 요리조리 골고루 뒤집어가며 당신과 한방에서 같이 익어 가셨다.
어느날 보니 짚을 엮어 행거에 이쁘게 걸어놓으신 것이다.
그즈음 집에 오는 사람마다 그 쿰쿰한 냄새를 맡아야 했지..
사실 과히 좋은 향은 아니다.
아무리 향을 피워도 잘 사라지지 않고..
옷에 그 깊은 냄새가 베어 나오는..
그런데도 엄마는 그 냄새가 향기로우시단다.
메주에 코를 대며 '난 이 냄새가 좋더라'..
조금씩 갈라지며 하얗게 푸르스름하게 곰팡이 꽃을 피워내던 메주..
겨우내 엄마와 동고동락하던..
오랜 세월동안 몸에 베인 습관처럼 행해오시던 엄마의 삶의 지혜..
장은 음력 정월이나 3월에 담궈야 좋단다.
왜 2월엔 안담그는지..
그리고 말馬날 담궈야지 뱀날이나 쥐날은 안좋단다.
그래서 우리집은 3월 13일, 음력 1월 24일 말날에 장을 담궜다.
오래도록 손질해온 항아리에 소금을 풀어 간을 맞춰 메주를 담그는 것이다.
메주는 전날 오래도록 동여놨던 짚을 풀고 솔로 살살 문질러 닦아 물기를 빼놓는다.
그 소금은 두해 전인가?
강화 염전에서 마지막으로 구한 천일염..
계란이 동전만하게 동동 떠오를만큼 간을 했다가
항아리에 천을 받쳐 소금 찌꺼기를 걸러낸다.
옛날엔 이때 메주가 잘 안떠오르면 집안에 좋지않은 일들이 생길까 걱정했단다.
우리집 메주는 적당히 잘 떠올랐다고..
이제 거기에 붉은 고추,참숯,대추등을 넣는다.
붉은 고추는 나쁜 귀신이 싫어하는 액막이용..
숯이나 대추는 살균용이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난뒤에 난 겨우 사진이나 찍은거다. 너무나도 아쉽게도..
얼마나 이쁘고 귀한 맘이 드는지..
유리 뚜껑을 얹어 놓았으니 새봄의 맑은 햇살을 고스란히 다 받아들이겠지.
흰구름이 둥실 떠오르기도 할테고.
새들의 날개짓도 얼핏 스쳐갈테고
온갖 새싹들의 소리, 다사로운 바람결따라
서서히 40여일동안 익어갈테다.
그리고선 메주를 건져내어 된장을 만들고 간장을 걸러내고..
이렇게 간장, 된장이 태어나는거다.
한 알의 콩 알갱이도 버리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
그 온갖 정성과 깊은 사랑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