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곡
권경인
낡은 새의 깃털을 손질하면서
여름내 깊어진 해바라기꽃 그늘에 서 있었네
광포한 햇빛과 폭풍우에
맑게 씻긴 얼굴을 하고
한마리 새를 날리기 위해
날마다 하늘을 우러렀었지
비에 젖고
바람에 상할까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동안
새는 차츰 내게 길들여지고
그렇게도 그리던 하늘을
마침내 잊은 듯도 하였네
처음엔 편하고 즐거웠지만
날개는 쉬 낡아지고 눈빛마저 어두워
어느날 무심코 새장 문을 열었을 때
그것은 문이 아니고 벽이었던 것을
해바라기꽃 그늘을 지나
양손에 새를 들고
숲길을 오래 걸었어
좀더 멀리 날려보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새의 무게는 가볍고
하늘은 맑아
이제는 놓아주는 일만 남았을 때
문득 새는 새가 아니고 허공이었음을,
나 오직 어둠속에 지쳐 홀로 서 있음을 알았네
저문 바람은 나뭇잎을 떨구고
나 또한 허공으로 돌아가는 길을
묵묵히 걷고 있을 때
문득 발길에 차이는 낯선 새의 비명,
누구였던가
맑게 닦인 허무의 얼굴로
당황한 날개를 퍼득이는 그는
상한 새의 깃털을 손질하며
어느새 쓰러진
해바라기꽃 그늘에 다시 서 보았네
어디선가 상심해 있을 고향과
우리들의 슬픈 죄와
비밀스런 허공도 간직하면서
'다시 꺼내 보고픈 글과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유의 길 (0) | 2007.11.10 |
---|---|
라마 크리슈나 (0) | 2007.11.08 |
들찔레와 향기 (0) | 2007.10.05 |
[스크랩] 천운영 - 늑대가 왔다 (0) | 2007.09.17 |
산경 (0) | 2007.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