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워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어제 일욜 하루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지요?

전 온종일 마당에 나앉아

눈 감고 구름을 그리다

바람을 맛보다

기형도를 울먹이다

나비 그림자를 뒤쫒다..

 

그렇게 가슴을 달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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