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의자
나의 지구에는
용서의 의자가 하나 놓여 있다
의자에 앉기만 하면 누구나
용서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절대고독의 의자 하나
쌩떽쥐뻬리의 어린 왕자가 해질녘
어느 작은 별에 앉아 있던 의자도 아니고
법정 스님이 오대산 오두막에 홀로 살면서
손수 만드신 못 생긴 나무의자도 아닌
못이 툭 튀어나와 삐걱삐걱 눈물의 소리가 나는
작은 의자 하나
누군가가 만들어놓고
다른 별로 떠났다
<시작메모>
나에게도 용서해야 할 시간, 용서받아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용서하기가 너무 어렵고 고통스럽다.
나 자신마저도 용서할 수 없는 '용서의 의자' 하나. 부디 당신이 만들어 주신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
설해목
천년 바람 사이로
고요히
폭설이 내릴 때
내가 폭설을 너무 힘껏 껴안아
내 팔이 뚝뚝 부러졌을 뿐
부러져도 그대로 아름다울 뿐
아직
단 한번도 폭설에게
상처받은 적 없다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히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밥값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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