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여관
일생에 한번쯤
수덕사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고
평생 오지 않았던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붉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비록 이튿날 아침 일찍 깨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일생에 하룻밤쯤
수덕여관 산당화에 기대어 잠을 자보아라
열매 맺지 않는 꽃이 맺은 열매에
다시 붉은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평생 오지 않는 잠이 있다면
수덕여관 샘물을 한 바가지 들이켜보아라
물 위에 코끼리를 타고
모든 쓸쓸한 사랑이 지나가버린다
다산 주막
홀로 술을 들고 싶거든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다산 주막으로 가서 잔을 받아라
다산 선생께서 주막 마당을 쓸고 계시다가
대빗자루를 거두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반겨주실 것이다
주모가 차려준 조촐한 주안상을 마주하고
다산 선생의 형형한 눈빛이 달빛이 될 때까지
이 시대의 진정한 취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 창밖으로 지나가는 딱딱한 구름과 술을 들더라도
눈물이 술이 되면 일어나 다산 주막으로 가라
술병을 들고 고층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무릎으로 걸어서라도 다산 주막으로 가라
강진 앞바다 갯벌 같은 가슴을 열고
다산 선생께서 걸어나와 잔을 내미실 것이다
참수당한 눈물의 술잔을 기울이실 것이다
무릎을 꿇고 막사발에 가득
다산 선생께 푸른 술을 올리는 동안
눈물은 기러기가 되어 날아갈 것이다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둥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나는 나의 가장 가난했던
미소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목마른 저녁 거리에서
내가 늘 마시던 물은
내 눈물까지 데리고 땅 속으로 사라지고
날마다 내 가슴속으로 눈부시게 날아오르던 새는
부러진 내 날개를 데리고 하늘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쓸쓸한 저녁 바닷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수평선과 함께
인간이 되고 싶었던 나의 모든 꿈조차
꿈속으로 사라져
캄캄한 서울
종로 피맛골 한 모퉁이
취객들의 밤의 발자국에 깊이 어린
별빛들만 사라지지 않고 홀연히
술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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