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불원..

그 이름처럼 옥으로 만들어진 불상들이 모셔진 곳

어떤 불상은 하나의 옥돌무게가 250톤이나 되는 것으로 새겨진 것도 있었다.

중국의 모든 것들이 그 규모에 놀라게 되지만 이 옥불을 보고서도 대단하다 여겨졌다.

향도 우리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커다란 향들을 피우던데 역시 우리의 모습이 내겐 더 정감있게 느껴진다.

이곳엔 500나한을 모신 동굴이 있는데

10원을 내면 음력생일에 맞춰 자신을 닮은 나한을 찾아볼 수 있는 카드를 뽑아 볼 수가 있었다.

위 사진들중에 나를 닮은 나한이 물론 계시다.

종교가 딱히 불교는 아니지만 마음을 가다듬어 절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지폐도 쥐어 드렸다.

이곳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나한을 찾아와 기도를 올리고 가곤 한단다.

나는 언제나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그 카드에 쓰여진 글귀를 20원을 내면 해석을 해주는데

나는 이 생에서 수행을 열심히 하면 마음의 지혜를 얻게 된단다.

마음에 드는,그러나 너무나 큰 의미인 그 글귀..

온갖 형상의 나한상에 세상 모든 의미가 담겨져 있는듯하다.

인내를 나타내기도

부를 표현하기도

자비를..

건강을..

학문을..

또한 석가모니 전생의 얼굴을 담은 모습도..

 

어찌됐건 내 생을 충실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다시 한번 다지는 계기가 되어준 옥불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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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래정 活來亭

        이슬비가 한두가닥 흩날리는 날 찾은 선교장

         활래정..물이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 사대부집의 전형을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경포호수는 장장 30리에 달하는 커다란 호수였었는데 이 호수를 배로 건너다녔다고 해서 선교장이 있는 곳을 배다리라 부르고

 집이름도 배다리의 한자어인 선교장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교장의 집터잡기와 관련해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 이씨가(李氏家)가 지금의 배다리로 옮겨온 것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대 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때였다.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아들 무경(이내번)과 더불어 충주로부터 강릉으로 옮겨와 저동(苧洞: 경포대 주변)에 자리를 잡은 뒤로 가산(家産)이 일기 시작하여,

 드디어 좀더 너른 터를 찾기에 이르른 어느날,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에는 한 떼를 이루어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긴 이내번은 족제비 떼의 뒤를 쫓아갔는데,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 속으로 그 많던 족제비의 떼는 사라지고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생각에 한동안 어리둥절하여 망연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족제비를 통하여 내리신 명당이라 생각하고 무릎을 쳤다.

시루봉에서 뻗어내리는 그리 높지 않는 산줄기가 평온하게 장풍(藏風)을 하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이 좌우로 뻗어,

왼쪽으로는 약동 굴신하는 생룡(生龍)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增殖)할 만하고, 약진하려는 듯한 호(虎)는 오른쪽으로 내려 자손의 번식을 보이는 산형이라 생각되었다.

더욱이 앞에는 얕은 내가 흐르고, 그 바른 편에는 안산(案山)이 있고, 왼편 시내 건너편에는 조산(朝山)이 있어

주산(主山)에 대한 객산(客山)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훌륭한 터였다는 것이다.

 하늘이 족제비를 통해 이렇게 훌륭한 터를 이씨가에 내린 것이라 믿은 이내번은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최근까지도 이씨가에서는 족제비의 먹이를 가져다 놓는 풍습이 전해 오고 있다.

 일찍이 선교장이 자리잡고 있는 배다리지역은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민속자료 전시관

 

 

 

 

 조인영(趙寅永)은 <활래정기(活來亭記)>에서 “선교장은 언덕이 둘러 있고 시내가 감싸 안았으며 땅은 기름져 곡식심기에 알맞고 과실과 풀열매며 물고기들을 놓아두고

값을 쳐서 받지도 않으며 또한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도 겸하여 갖추었다”고 하였다

선교장은 유력한 살림집으로 알려져 수많은 건축가들의 주목을 끌어왔다.

1970년대 중반에 건축학자 정인국(鄭寅國, 1916∼1976)은 “한국 상류주택의 두 가지 유형인 집약된 건물배치와 분산 개방된 건물배치 가운데 선교장은 후자에 속한다.

통일감과 균형미는 적지만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생활의 활달함이 가득 차 보인다”(<<한국건축양식론>>)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김봉열(金奉烈,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은 “가족용 주택 영역을 대외적 영역이 감싸고 있는 중첩적인 구성이다.

선교장을 통해서 한국건축의 집합구성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건물군의 형태적인 집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교장의 조영사가 축적해온 시간적 집합의 모습이기도 하다”(<<앎과 삶의 공간 2>>)고 해석하기도 했다.

 한옥 전문가 신영훈(申榮勳)은 특히 선교장의 활래정에 대해 “얼핏 보면 ㄱ자형의 정자로 보이나 구조는 두 채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결구도 지붕도 각각 형성되어 있다. 이런 쌍정(雙亭)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렵다”(<<한옥의 향기>>)고 평가하기도 했다.

 선교장은 남자 어른들이 거주하던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 사랑채, 하인들이나 손님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여자 어른들이 쓰던 안채, 집 앞 연못에 있는 정자인 활래정, 아주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모셨던 별당 건물 두 채 등 모두 10 채가 넘어 살림집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행랑채에는 대문이 두 개가 나 있다.

왼편에 솟을대문이고, 오른편에는 평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사랑채로 가는 남자들이, 평대문은 안채로 가는 여자들이 드나드는 대문이다.

 

 

 

솟을대문

       남자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선교유거(仙嶠幽居)’라고 적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평대문

    안채로 들어가는 여자들의 전용문

    이날 관람객들은 여자 남자 모두 가리지않고 평대문으로 들어갔다.

 

 

 

 

 

내외벽

     안채의 여자들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경계벽

 

 

 

솟을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라고 적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신선처럼 여유 있게 살고 싶어 한 집주인의 소망을 담은 당호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왼편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사랑채 마당과 함께 ‘열화당’(悅話堂)이라고 이름 붙인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后)가 건립한 것이며 도연명 시인의 시「귀거래사(歸去來辭)」중에서 "....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憂愁)를 쓸어 버리리라.....(.... 世興我而相遺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하는 구절 가운데 "친척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고 (悅親戚之情話)"에서 '悅'자와 '話'자를 따서 '열화당(悅話堂)'이라 이름지었다.

뒷 산의 노송과 열화당 옆에 있는 계화나무와 뒤뜰에 서 있는 수백년에 된 늙은 백일홍나무는 열화당과 연륜을 함께 해왔고 살림집의 아취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활래정은 대문 밖인 선교장 입구에 있는 큰 연못 옆에 세워진 정자로서,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이 정자는 중국 남송(南宋)의 대유학자 주희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시 중에서 "작은 연못이 거울처럼 펼쳐져/하늘과 구름이 함께 어리네/묻노니 어찌 그 같이 맑은가/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半畝方塘日鑑開/天光雲影共徘/問渠那得淸如許/爲有源頭活水來)란 구절에서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의 '活'자와 '來'자를 따서 '활래정(活來亭)'이라 하였다.

 

 

 

 

 

 

동별당

     안채 동쪽의 별채

     집안 손님들의 거처로 사용하던 곳

 

 

 

 

현재의 건물은 오은의 증손인 경농(鏡農)이 중건한 것이다.

 일찍이 권영좌(權永佐)는 <오산당기(鰲山堂記)>에서 “선교장의 주인은 산에 살면서 바다의 경치도 겸하여 가졌다.

그 사는 곳에 연을 심는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섬을 빚고 섬 위에 정자를 얽었다”고 하였다.

또한 조인영은 앞서 말한 <활래정기>에서 “경포호와 동해를 선교장 집의 문과 정원으로 소유하고 있다”고까지 극찬하였다.

활래정은 창덕궁의 부용정(芙蓉亭)과 흡사한 모습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활래정은 이름 그대로 선교장에서 북쪽에 있는 한밭(大田)의 태장봉(胎藏峰)으로부터 끝임 없이 내려오는 맑은 물로 이 연못의 활수(活水)가 되고

 여름철이면 연꽃의 아름다움은 선교장 전체의 분위기를 살린다.

선교장 터를 이루는 산줄기는 대관령에서 뻗어내린 줄기이다.

 대관령에서 뻗은 산줄기의 한 가닥은 오죽헌 자리를 만들고 다시 동북쪽으로 뻗어 시루봉으로 솟고 시루봉에서 뭉친 맥은 경포대 방향으로 뻗어가면서

여러 개의 자그마한 산줄기들을 나누게 된다.

시루봉에서 뻗어내린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이 선교장 뒤편으로 흘러 청룡과 백호를 이루었다.

 선교장의 좌향은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30도 정도를 튼 남서향인 간좌(艮坐)이다. 좌향을 정남향으로(子坐)으로 놓아 시원한 전망을 확보하지 않은 것은

백호 끝 자락을 안대로 삼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선교장 행랑채 23칸을 일자로 배치한 까닭이 수구가 열려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선교장의 낮은 언덕에는 수십그루의 노송으로 가득차 있다.

 선교장 담장 너머로 늘어선 소나무숲에서 선교장을 바라보면 청룡과 백호가 집터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으며 반대편 백호안산에서는

선교장 전경을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관산점이 된다.

선교장에서 풍수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시설물은 청룡자락 앞에 있는 활래정의 위치이다.

연못의 위치가 청룡의 끝 자락에 해당되는 곳이라 “기는 물과 경계를 이루면 머문다(氣界水則止)”에 부합되는 자리이다.

 활래정은 청룡이 짧은 것을 보완해주며, 활래정 연못의 물은 명당 안의 생기(生氣)를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시설물(상징물)은 백호 끝자락에 보이는 돌백호상이다. 이 백호 끝자락에 돌백호가 놓여 있는 사연은 풍수비보의 한 사례가 되어 흥미롭다.

 약 20여년전에 선교장의 백호 끝자락에 민속자료전시관을 신축하면서 백호자락이 훼손되자 선교장 14대 종부 성기희(成耆姬) 여사가 관계 당국에 항의하자

 강릉시청에서 비용을 대 백호자락을 비보하기 위해 호랑이상을 설치하게 되었다.

훼손된 백호맥을 보완하기 위해 풍수비보의 차원에서 설치한 백호상을 통해 현대적인 명당가꾸기의 일면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다만 풍수 비보 상징물을 놓은 위치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백호상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위압적으로 디자인하여

 연륜이 묻어나는 선교장의 자연환경과 가옥들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러시아식 건축 양식이 보이는 열화당 뒷편의 커다란 회화나무

이 나무가 귀신을 물리쳐준다고..

회화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유명한 학자가 태어난다고 하고, 세그루를 심으면 대길(大吉)한 일만 생긴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열화당은 주인의 맏아들의 거처로 집안 식구들이 정다운 이야기(열화)를 나누며 지내자는 의미이다.

 

 

 

수백년을 살아온 노송이 이 아름다운 집의 역사를 말하는듯하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한 잔 차라도 누릴 수 있다면

시문이 절로 나오리..

 

 

 

 

 

                                                                                                    자료출처;문화원형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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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이순원 소설속 은비령을 넘다
‘은비령’은 지도에 없다. 그러나, 있다. 한계령 정상에서 양양으로 내려가다 오른편 인제로 빠지는 갈림길을 타고 넘어가는 고갯길. 해발 900m의 고개 마루를 넘어서자 눈발이 흩날렸다. 녹다 남은 눈이 은색의 비 같다. 은비가 내리는(銀飛), 숨어있는 비밀의 고개(隱秘). 사진기자가 중얼거렸다. “여기서 시계가 멈추었는데….”

‘은비령’은 소설가 이순원이 1996년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자 배경이다. 우주의 시간과 별의 시간을 견디는 사랑 이야기. 시간이 멎은 곳, 은비령은 소설을 따라 따져보면 인제군 인제읍 귀둔 1리 필례약수 근처다. 소설가인 ‘나’는 죽은 친구의 아내인 ‘여자’를 사랑하게 됐지만, ‘마음 속의 소금짐’을 어찌하지 못해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 핸들을 꺾어 이곳 은비령으로 왔다. 눈발이 날리는 고개를 넘는 순간 ‘나’의 자동차 속 시계는 ‘0:00’을 가리키며 멎었다. 우리의 자동차 속 시계는 ‘03:07’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은 꽁꽁 얼어붙었다. ‘구비마다 구부러진 산허리를 다 돌고 나서야 마주오는 길의 자동차를 볼 수 있는 급커브 언덕길’이었다. 가파른 내리막길을 다 내려가면 필례약수, 거기서 6㎞를 더 가면 인제와 현리로 갈라지는 삼거리다. 도로가 포장된 것은 1996년. 귀둔리 주민 이기영씨(53)는 “김재규가 3군단장 할 때(72년) 뚫어놓은 도로”라고 일러줬다. 동네 사람들은 ‘필례령’ ‘피래령’이라고 하고, ‘작은 한계령’이라고도 부른다. 필례는 피란간다는 ‘피래’에서 온 말. 그만큼 꼭꼭 숨어있는 곳이다.

소설 속에서 ‘나’는 눈길을 헤치며 겨우 고개를 넘어 ‘친구’와 고시공부를 하던 화전마을에 닿았다. 해발 1,200~1,500m의 주걱봉, 가리봉, 삼형제봉이 병풍처럼 우뚝 둘러선 곳. 겨울엔 눈이 은비가 되어 날리고, 필례골의 돌틈 사이로 가파르게 여울이 흐르는 곳. 그들은 이곳을 ‘은비령(隱秘嶺)’, 자신들이 머물던 집을 ‘은자당(隱者堂)’이라고 불렀다.

작품 속 ‘은자당’ 자리인 필례약수와 군량밭 마을엔 펜션과 산장이 들어섰다. 그래봐야 열네 가구가 전부다. 74년부터 필례약수 근처에서 살아왔다는 김월령씨(52)는 “옛날엔 여덟 가구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고 기억했다. 70년대말 화전민 정리정책에 따라 주민들이 40만원씩 이주금을 받고 마을을 떠났고, 빈 밭엔 낙엽송을 심었다. 군량밭에 있었다는 7만평의 밭도 낙엽송 숲으로 변했다. 다시 사람이 든 것은 80년대 후반. 톡 쏘는 탄산수인 필례약수 물맛이 소문나면서 등산객들이 알음알음 찾아왔다. 전기가 들어온 것도 겨우 10년 전, 96년이다.

‘나’는 은비령에 온 이튿날, 그를 쫓아온 ‘여자’를 만난다. 그들은 별이 빛처럼 쏟아지는 은비령에서 영원을 기약하고 스쳐 지나가는 혜성을 보고, 별을 본다. 별이 궤도를 따르듯 이 세상의 모든 일은 2천5백만년의 주기로 되풀이된다고 했다. ‘나’와 ‘여자’는 ‘다음 생애를 위해 지금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놓고 싶다’며 이곳에서 사랑하고, 또 이별한다.

2천5백만년 후에도 ‘밤하늘의 은하수를 볼 수 있을 만큼’ 맑은 은비령의 밤하늘을 보고 있을까. 밤이 깊어지면 불빛은 사라지고 별만 남는다. 오리온자리, 큰개자리, 황소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 맨눈으로 보기 힘들다는 북두칠성의 네번째 별도 보인다. 자신의 숨소리밖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점봉산과 가리산맥의 준봉 위로 펼쳐진 별하늘을 보고 있으면 문득 시간이 멈춘 것도 같다. ‘은비령 너머의 세상은 깜깜하게 멈추어 서고, 2천5백만년보다 더 긴 시간을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는 소설처럼.

‘은비령’이 97년 현대문학상을 받고, 이어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생겼다. ‘은비령 카페’도, ‘은비령 산장’도 생겼다. 이순원씨도 해마다 제자들과 문학기행을 온다. 그러나 아직까지 가족이나, 학생 단체 관광객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주의 시간과 별의 시간을 느끼기엔, 여럿은 너무 많다.

소설의 끝은 이렇다. ‘그날 밤, 은비령엔 아직 녹다 남은 눈이 날리고 나는 2천5백만년 전의 생애에도 그랬고 이 생애에도 다시 비껴 지나가는 별을 내 가슴에 묻었다.…우리는 이 생애가 길지 않듯 이제 우리가 앞으로 기다려야 할 다음 생애까지의 시간도 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행길잡이

▶교통

‘은비령’은 공식 지명이 아니다. 귀둔리 주민을 잡고 “은비령이 어디냐”고 물어봐야 “거기가 어디래요?”라는 대답을 듣기 일쑤다. 소설 ‘은비령’의 무대는 인제군 인제읍 귀둔리 필례약수(사진)이고, 은비령은 한계령에서 필례약수로 가는 필례령이다.

소설가 이순원씨는 “은비령이란 이름을 직접 붙였다”고 하고, 일부 주민은 “깎아지른 듯 숨어있다고 해서 옛날부터 은비령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인제군청은 “은비령이라고도 하는데 유래는 알 수 없다”며 인제군사(郡史)를 펴들었지만, 군사엔 은비령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어쨌거나, 소설 덕분에 ‘은비령’이 알려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한계령 휴게소를 지나 양양 방향으로 800m쯤 가다 오른쪽 ‘내린천 가는 길’ 이정표를 보고 들어간다. 필례약수까지 4.5㎞, 약수에서 6㎞를 더 가면 31번 국도(현리 방향)와 46번 국도(인제 방향)로 연결되는 삼거리가 나온다. 은비령 고개는 설악에서 가장 늦게 눈이 녹는 곳. 겨울철엔 언제나 얼어 있다. 4륜구동이 아니라면 설설 기어야 한다. 승용차는 인제~삼거리~필례약수로 거슬러 가는 편이 낫다.

▶숙박·먹거리

필례약수 앞 ‘필례식당’(033-463-4665)에서 음식도 팔고 민박도 친다. 토박이 김월령씨가 20년째 운영한다. 식당 옆 ‘은비령 카페’ ‘은비령 산장’이 모두 한 집이다. 황태해장국, 감자수제비, 산채비빔밥 등을 판다. 5,000~6,000원. 필례약수 뒤 ‘들꽃피는 식당’도 올갱이해장국, 산채정식 등을 파는데, “수도가 얼어 1주일째 영업을 못하고 있다”고 했다. 두 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식당이 없다. 맛집을 찾는다면 한계령을 거슬러내려가 용대리 쪽으로 가야 한다. 황태구이집이 많다. 돌바우식당(033-462-5444)은 돌판에 구운 황태를 얹어 내고, 진부령 식당(033-462-1877)은 구운 황태에 양파채를 얹어 낸다.

‘저달마지 펜션’(033-463-3000)은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좋다. 주중 6만원, 주말 8만원. 숙박하지 않더라도 1층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 아르바이트생 최철순씨(24)와 개 세 마리가 펜션을 지킨다. “사람 그림자만 봐도 반갑다”고 할 만큼 겨울철엔 한적하다. 식당도, 매점도 문을 닫은 곳이 많다. 여름철엔 ‘내설악에서 가장 조용한 곳’을 찾아오는 단골들로 제법 흥청거린다고 한다.

출처 : 흙에서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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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常(무상)으로 영원한 바다를 본다

▲ 바다를 바라보고 앉은 망해사의 극락전과 낙서전(樂西殿). 즐거움의 궁극, 즉 극락의 세계란 ‘지는 해를 기꺼워’할 줄 아는 데서 비롯됨을 일깨우는 것 같다.

‘김만경’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사람 이름은 아닙니다. 한 글자를 더 붙여 ‘김만경뜰’이라고 하면 확실히 감이 올 겁니다. 김제·만경평야를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부르더군요. 이 고장 말로는 ‘징계 맹경 외애밋들’이라고 한답니다. 김제 만경의 너른 들을 일컫는 말이겠지요.

‘바다를 바라보는 절’ 망해사(望海寺)-.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습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 나들목에서 나와 만경읍을 거쳐 진봉면으로 가는 그 길은 들판 가운데로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정점, 만경평야를 가로지르는 길입니다. 가을걷이를 끝낸 텅 빈 들녘에는 청보리 싹이 하늘을 담고 있더군요. 쌀 수입 때문에 시름 깊은 농민들에게 그 푸른 싹이 위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움직임. 세계의 실상은 이처럼 한 순간도 고정됨이 없다. 위대한 발견자, 붓다의 통찰이다.
차를 세우고 들판을 거닐어 봅니다. 바둑판의 금 같은 수로와 도로를 따라 선 전봇대가 솟대처럼 느껴집니다. 그것으로 하여 들판의 수평성은 무한히 확장됩니다. 점점이 흩뿌려진 듯한 집들은 상당히 이국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땅덩어리가 얼마나 좁았으면, 하고 자조할 일은 아닙니다. 산이 워낙 많은 나라에 사는 탓이겠지요. 

다시 들판을 달리자 야트막한 구릉 사이로 망해사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나타납니다. 초입은 소나무 숲길입니다. 짧지만 운치 그윽한 숲길이 허리를 낮출 즈음, 홀연히 한 바다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곁에 망해사가 바다를 보고 앉아 있습니다. 한참을 달려온 들판의 느낌은 어느 새 다 지워지고, 산과 바다와 절만이 한가롭습니다.

망해사는 작은 절입니다. 전각이라 해 봐야 주불전인 극락전과 낙서전(樂西殿), 종각, 그리고 요사가 전부입니다. 절의 규모나 문화재에 관심을 둔 탐방객이라면 아주 실망할 수도 있는 절입니다. 하지만 참으로 절다운 절입니다. 그 절다움은 낙서전(樂西殿)으로 하여 선명해집니다. ‘해 지는 서쪽을 기꺼워한다’는 이 ‘거대한 소박’ 앞에서 오늘 우리들의 ‘비만한 풍요’는 얼마나 초라한가요.

“낙조는 해가 산 넘은 뒤가 더 아름다워”

▲ 망해사 입구의 부도. 풍화가 심해 주인을 알 길 없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랴. 모든 형상의 본질은 ‘공(空)’인 것을.

망해사가 등을 기대고 있는 진봉산은 구릉에 가깝습니다. 해발고도라 해봐야 72m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산기슭의 우람한 소나무들이 워낙 훤출하고 울울하여 깊은 산처럼 느껴집니다.

“진봉산요? 이곳에서는 얼마나 대단한 산인데요.”

주지 정국 스님의 말입니다. 스님의 말대로 진봉산은 예로부터 대단한(?) 산이었습니다. 대동여지도에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경현 조에도 진봉산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절의 소재지인 진봉면의 이름도 이 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망해사는 산과 바다 혹은 땅과 물 사이에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이 온전히 자연에 깃들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해 지는 서쪽을 기꺼워할 수밖에 없는(樂西)’ 심미적 환기력으로 충만한 절이 바로 망해사입니다.

망해사는 시적인 절입니다. 자연이 빚은 절정의 시어(詩語)가 무시로 빛납니다. 그 몇 토막을 정국 스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차를 마시며 툭툭 던지듯 내뱉는 스님의 말투는 시인의 그것이었습니다.

“낙조는 해가 산을 넘고 난 뒤가 더 아름다워요.”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낙서전 뒤로 녹차의 뒷맛 같은 노을이 걸려 있습니다.

“해는 가을부터 작아지면서 더 해맑아져요. 겨울요? 회초리로 맞는 것 같은 싸한 바람 맛이 좋죠. 그것을 즐길 줄 모르면 살기 힘든 절이지요.”

스님은 시인 기질 못지않게 선동가 기질도 다분했습니다.

“달은 보름보다 열나흘이 더 좋아요. 약간 모자란 듯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더 좋지요.”

▲ 망해사의 상징인 낙서전(樂西殿). 지는 해를 즐기는 집이라는 당호를 단 집이다. 1589년에 진묵 스님이 처음 지은 이후 근년에 손을 보았으나 기본적인 형태는 그대로라고 한다.

우리는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음력 10월13일이어서 스님 말대로 약간 빈 달이 들판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차를 몰고 들판을 가로질렀습니다. 광활면을 지나는 들판은 이름 그대로 광활(廣闊)했습니다만, 한자는 廣活이라고 씁니다. 그런데 광활면 일대는 대부분 개펄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이 동진강 하구에 방조제를 쌓고 경작지로 만든 수탈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본디는 진봉면에 속해 있다가 해방 뒤 1949년에 광활면으로 분리됐습니다.

김제·만경평야는 해남 대둔산에서 발원한 만경강과, 정읍 상두산에서 발원한 동진강이 남과 북을 감싸듯 흐르며 서해로 흘러드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강이 만나는 곳이 바로 새만금입니다. 이제 새만금 방조제 공사가 끝나면 망해사 앞 바다는 엄격한 의미에서 바다가 아닙니다. 물이 통하기는 한다지만 역동성이 거의 없는 바다가 되겠지요.

▲ 망해사 뒤 진봉산 등마루의 숲길. 심포 포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바다를 보며 숲을 거니는 것도 망해사가 안겨주는 큰 즐거움의 하나다.
과거 동진강 방조제가 일인들의 수탈 행위였다면, 21세기의 새만금 방조제는 문명의 수탈입니다. 망해사가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후대의 사가들은 문명의 둑으로 막힌 새만금의 바다에서 21세기의 비극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나마 절망적이지 않은 것은 완전히 물을 가두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의 끝없는 생명력에 희망을 걸어 봅니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곳에 처음 절을 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통일신라시대인 754년(경덕왕 13)에 중국에서 온 중도(中道) 스님이 세웠다는 설도 있고, 백제 후기의 도장(道藏) 혹은 통장(通藏) 스님이 세웠다는 설도 있습니다. 현재 절에서는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부설 거사가 세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1589년(조선 선조 22)에 진묵 스님이 낙서전을 지은 이후 1933년과 1977년에 고쳐 지었고, 극락전은 1991년에 중창한 것입니다.

현재 절에서 부설 거사를 초창자로 여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부설 거사가 도를 이룬 곳은 옆 동네인 부안 변산의 월명암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사에는 전설적인 세 거사가 있습니다. 인도의 유마힐, 중국의 방온, 그리고 한국의 부설 거사가 바로 그들입니다.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대승 선언으로 널리 알려진 유마힐. 전재산을 바다에 버리고 대바구니를 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당대의 이름난 선사들을 통쾌하게 꺾어버린 선의 고수 방온. 이들 거사의 행적이 높게 빛난다면 부설 거사의 삶은 인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 망해사에는 인위적인 손길이 거의 없다. 절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초도 없다. 해와 바닷바람만 먹고 자라는 배추와 무, 갓이 꽃 같다.

벙어리 처녀 입을 연 부설 거사의 법문

▲ 망해사 마당에서 바라본 바다. 낙서전과 종각 사이의 팽나무가 ‘망해(望海)’의 즐거움을 상징하듯 서 있다.

불국사로 출가한 부설 거사(당시는 거사가 아니었지만)는 도반 영희(靈熙)·영조(靈照) 스님과 함께 지리산·천관산·능가산 등지서 수행하다가 문수도량을 순례하기 위해 오대산으로 향했습니다. 가던 길에 거사는 지금의 김제 만경의 두릉에서 구무원(仇無寃)이라는 사람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18살이 되도록 벙어리로 살던 구씨의 딸 묘화(妙花)가 거사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터졌습니다. 묘화는 함께 살기를 간절히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거사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묘화는 자살 기도로 자신의 입장에 충실했습니다. 거사는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는 유마의 선언을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 망해사의 뒤란격인 김제·만경 평야. 동진강과 만경강이 남북을 감싸며 흐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다. 산지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거사는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아이를 부인에게 맡기고 수도에 전념했습니다. 그는 결코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속에 처하되 그것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훗날 옛 도반 영희와 영조가 찾아와 도력을 시험했을 때, 대들보에 매단 물병을 깨뜨려 물을 떨어지지 않는 것은 거사의 것밖에 없었습니다. 살활(殺活) 자재의 경지에 든 것입니다. 거사는 다음과 같은 임종게를 남기고 좌탈하였습니다.

눈으로 보는 바 없으니 분별할 것이 없고 

귀로 듣는 바 없으니 시비 또한 사라지네.

분별 시비는 모두 놓아 버리고 

다만 마음 부처 보고 스스로 귀의할지라.

目無所見無分別  耳聽無聲絶是非

分別是非都放下  但看心彿自歸依

▲ 요사채에 걸린 망해사 편액. 자연에 온전히 깃든 즐거움이 듬뿍 묻어있다.
부설 거사가 바라봤을 그 바다를 지금 우리도 보고 있습니다. 물이 들 때는 시끄럽고, 물이 나가고 나면 호수 같기도 한 바다입니다만, 한 순간도 출렁거림을 멈춘 적이 없는 바다입니다. 무상(無常)으로 영원한 자연이 거기에 있습니다.

망해사는 한가한 절입니다. 그러나 그 한가함을 즐길 뿐 탐하지는 않습니다. 풍경 소리 대신 바람을 몰고 오는 밀물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정정현 차장 rockart@chosun.com

 

출처//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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