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래정 活來亭
이슬비가 한두가닥 흩날리는 날 찾은 선교장
활래정..물이 끊임없이 흘러온다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선교장은 조선 시대 상류 사대부집의 전형을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주택으로 알려져 있다.
옛날 경포호수는 장장 30리에 달하는 커다란 호수였었는데 이 호수를 배로 건너다녔다고 해서 선교장이 있는 곳을 배다리라 부르고
집이름도 배다리의 한자어인 선교장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교장의 집터잡기와 관련해 흥미로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 이씨가(李氏家)가 지금의 배다리로 옮겨온 것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대 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때였다.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아들 무경(이내번)과 더불어 충주로부터 강릉으로 옮겨와 저동(苧洞: 경포대 주변)에 자리를 잡은 뒤로 가산(家産)이 일기 시작하여,
드디어 좀더 너른 터를 찾기에 이르른 어느날,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에는 한 떼를 이루어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이상하게 여긴 이내번은 족제비 떼의 뒤를 쫓아갔는데,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소나무 숲 속으로 그 많던 족제비의 떼는 사라지고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생각에 한동안 어리둥절하여 망연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족제비를 통하여 내리신 명당이라 생각하고 무릎을 쳤다.
시루봉에서 뻗어내리는 그리 높지 않는 산줄기가 평온하게 장풍(藏風)을 하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이 좌우로 뻗어,
왼쪽으로는 약동 굴신하는 생룡(生龍)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增殖)할 만하고, 약진하려는 듯한 호(虎)는 오른쪽으로 내려 자손의 번식을 보이는 산형이라 생각되었다.
더욱이 앞에는 얕은 내가 흐르고, 그 바른 편에는 안산(案山)이 있고, 왼편 시내 건너편에는 조산(朝山)이 있어
주산(主山)에 대한 객산(客山)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훌륭한 터였다는 것이다.
하늘이 족제비를 통해 이렇게 훌륭한 터를 이씨가에 내린 것이라 믿은 이내번은 그 해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면서 최근까지도 이씨가에서는 족제비의 먹이를 가져다 놓는 풍습이 전해 오고 있다.
일찍이 선교장이 자리잡고 있는 배다리지역은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민속자료 전시관
조인영(趙寅永)은 <활래정기(活來亭記)>에서 “선교장은 언덕이 둘러 있고 시내가 감싸 안았으며 땅은 기름져 곡식심기에 알맞고 과실과 풀열매며 물고기들을 놓아두고
값을 쳐서 받지도 않으며 또한 산과 바다의 아름다움도 겸하여 갖추었다”고 하였다
선교장은 유력한 살림집으로 알려져 수많은 건축가들의 주목을 끌어왔다.
1970년대 중반에 건축학자 정인국(鄭寅國, 1916∼1976)은 “한국 상류주택의 두 가지 유형인 집약된 건물배치와 분산 개방된 건물배치 가운데 선교장은 후자에 속한다.
통일감과 균형미는 적지만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생활의 활달함이 가득 차 보인다”(<<한국건축양식론>>)고 평가한 바 있다.
또한 김봉열(金奉烈,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은 “가족용 주택 영역을 대외적 영역이 감싸고 있는 중첩적인 구성이다.
선교장을 통해서 한국건축의 집합구성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건물군의 형태적인 집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교장의 조영사가 축적해온 시간적 집합의 모습이기도 하다”(<<앎과 삶의 공간 2>>)고 해석하기도 했다.
한옥 전문가 신영훈(申榮勳)은 특히 선교장의 활래정에 대해 “얼핏 보면 ㄱ자형의 정자로 보이나 구조는 두 채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결구도 지붕도 각각 형성되어 있다. 이런 쌍정(雙亭)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렵다”(<<한옥의 향기>>)고 평가하기도 했다.
선교장은 남자 어른들이 거주하던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 사랑채, 하인들이나 손님들이 머물렀던 행랑채, 여자 어른들이 쓰던 안채, 집 앞 연못에 있는 정자인 활래정, 아주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모셨던 별당 건물 두 채 등 모두 10 채가 넘어 살림집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하고 있다.
행랑채에는 대문이 두 개가 나 있다.
왼편에 솟을대문이고, 오른편에는 평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사랑채로 가는 남자들이, 평대문은 안채로 가는 여자들이 드나드는 대문이다.

솟을대문
남자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선교유거(仙嶠幽居)’라고 적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평대문
안채로 들어가는 여자들의 전용문
이날 관람객들은 여자 남자 모두 가리지않고 평대문으로 들어갔다.


내외벽
안채의 여자들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경계벽
솟을대문에는 ‘선교유거(仙嶠幽居)’라고 적은 현판이 걸려있는데,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신선처럼 여유 있게 살고 싶어 한 집주인의 소망을 담은 당호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왼편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사랑채 마당과 함께 ‘열화당’(悅話堂)이라고 이름 붙인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이 건물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后)가 건립한 것이며 도연명 시인의 시「귀거래사(歸去來辭)」중에서 "....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憂愁)를 쓸어 버리리라.....(.... 世興我而相遺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하는 구절 가운데 "친척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고 (悅親戚之情話)"에서 '悅'자와 '話'자를 따서 '열화당(悅話堂)'이라 이름지었다.
뒷 산의 노송과 열화당 옆에 있는 계화나무와 뒤뜰에 서 있는 수백년에 된 늙은 백일홍나무는 열화당과 연륜을 함께 해왔고 살림집의 아취를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활래정은 대문 밖인 선교장 입구에 있는 큰 연못 옆에 세워진 정자로서,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주위에 난간을 돌렸다.
이 정자는 중국 남송(南宋)의 대유학자 주희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시 중에서 "작은 연못이 거울처럼 펼쳐져/하늘과 구름이 함께 어리네/묻노니 어찌 그 같이 맑은가/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半畝方塘日鑑開/天光雲影共徘/問渠那得淸如許/爲有源頭活水來)란 구절에서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의 '活'자와 '來'자를 따서 '활래정(活來亭)'이라 하였다.


동별당
안채 동쪽의 별채
집안 손님들의 거처로 사용하던 곳
현재의 건물은 오은의 증손인 경농(鏡農)이 중건한 것이다.
일찍이 권영좌(權永佐)는 <오산당기(鰲山堂記)>에서 “선교장의 주인은 산에 살면서 바다의 경치도 겸하여 가졌다.
그 사는 곳에 연을 심는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섬을 빚고 섬 위에 정자를 얽었다”고 하였다.
또한 조인영은 앞서 말한 <활래정기>에서 “경포호와 동해를 선교장 집의 문과 정원으로 소유하고 있다”고까지 극찬하였다.
활래정은 창덕궁의 부용정(芙蓉亭)과 흡사한 모습으로 축조되었다고 한다.
활래정은 이름 그대로 선교장에서 북쪽에 있는 한밭(大田)의 태장봉(胎藏峰)으로부터 끝임 없이 내려오는 맑은 물로 이 연못의 활수(活水)가 되고
여름철이면 연꽃의 아름다움은 선교장 전체의 분위기를 살린다.
선교장 터를 이루는 산줄기는 대관령에서 뻗어내린 줄기이다.
대관령에서 뻗은 산줄기의 한 가닥은 오죽헌 자리를 만들고 다시 동북쪽으로 뻗어 시루봉으로 솟고 시루봉에서 뭉친 맥은 경포대 방향으로 뻗어가면서
여러 개의 자그마한 산줄기들을 나누게 된다.
시루봉에서 뻗어내린 부드럽고 완만한 능선이 선교장 뒤편으로 흘러 청룡과 백호를 이루었다.
선교장의 좌향은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30도 정도를 튼 남서향인 간좌(艮坐)이다. 좌향을 정남향으로(子坐)으로 놓아 시원한 전망을 확보하지 않은 것은
백호 끝 자락을 안대로 삼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선교장 행랑채 23칸을 일자로 배치한 까닭이 수구가 열려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선교장의 낮은 언덕에는 수십그루의 노송으로 가득차 있다.
선교장 담장 너머로 늘어선 소나무숲에서 선교장을 바라보면 청룡과 백호가 집터를 안온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으며 반대편 백호안산에서는
선교장 전경을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관산점이 된다.
선교장에서 풍수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시설물은 청룡자락 앞에 있는 활래정의 위치이다.
연못의 위치가 청룡의 끝 자락에 해당되는 곳이라 “기는 물과 경계를 이루면 머문다(氣界水則止)”에 부합되는 자리이다.
활래정은 청룡이 짧은 것을 보완해주며, 활래정 연못의 물은 명당 안의 생기(生氣)를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시설물(상징물)은 백호 끝자락에 보이는 돌백호상이다. 이 백호 끝자락에 돌백호가 놓여 있는 사연은 풍수비보의 한 사례가 되어 흥미롭다.
약 20여년전에 선교장의 백호 끝자락에 민속자료전시관을 신축하면서 백호자락이 훼손되자 선교장 14대 종부 성기희(成耆姬) 여사가 관계 당국에 항의하자
강릉시청에서 비용을 대 백호자락을 비보하기 위해 호랑이상을 설치하게 되었다.
훼손된 백호맥을 보완하기 위해 풍수비보의 차원에서 설치한 백호상을 통해 현대적인 명당가꾸기의 일면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다만 풍수 비보 상징물을 놓은 위치는 나무랄 데가 없으나 백호상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위압적으로 디자인하여
연륜이 묻어나는 선교장의 자연환경과 가옥들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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